사진의 주제와 소재주의적 경향
소재주의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소재주의란 표현이 있기는 한지부터가 의심스럽지만 일반적으로 주제라고 하는 것이 엄밀하게는 소재가 되는데, 내가 찍고자 하는 주요 피사체, 즉 소재가 자연이랄까 자연풍경이랄까, 아무튼 자연이란 단어가 수식어 또는 명사로 붙는 것들이고 보니 실제 사진을 찍는 일이 생활 주변에서는 의외로 쉽지가 않다.
이 글은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끄적여 둔 순전히 개인적인 글이다. 혹 동일한 오류 속에서 갑갑해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경험과 느낌의 공유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부끄럼을 무릅쓰고 올려 본다.
사진이란 것이 단순한 기록 또는 의사전달의 도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예술과 창작의 새로운 지평인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촬영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셔터를 누르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마치 그림이 기록의 도구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전이되고 의사소통의 도구로서의 글이 읽는 이에게 감동과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라는 예술이 되듯이 사진 역시 단순한 기록의 도구일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은 보는 이 또는 듣는 이, 읽는 이에게 어떤 종류가 되었건 감동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한가지의 감동이나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복합적이면서도 강하고 지속적이고 시종이 일관하거나 나아가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새록새록 새로운 맛과 향이 풍겨나는 그런 감흥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진을 예술, 또는 창작활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진 속에는 본인이 의도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내지는 의미라든가 내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리고 여기서 그 주제를 표현해 주는 매개체가 바로 소재가 된다.
소재주의는 바로 이런 매개체를 찍는 것만으로 주제를 대신하려는 경향 내지는 풍조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겠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사진에 있어서는 특히 이런 소재주의적 경향이 강한 듯이 보인다.
어느 계절이 되면 어디에 무슨 꽃이 피고 어느 계절이 되면 어느 산 어디에 운해가 지고 등등 운해나 꽃, 백로, 폭포, 계곡, 설화, 산능선, 태양 등등의 모든 자연적인 사진소재들이 그 자체로서 사진을 찍는 이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하니 추암으로 남애리로 남해로 등등 전국사방을 돌아다니며 누가 어디 뭐가 좋은 소재가 있다더라 하면 천리길을 멀다 않고 밤을 새어서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물론 창조는 무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나 할 수 있다고 우리가 가정할 수 있을 지언정 유한한 인간의 창조는 과거의 것들에 대한 답습과 모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방도 아주 기가 막히게 모방을 해서 그것이 지루하다고 느낄 때 그 다음에야 그 이전의 창조를 넘어서는 새로움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로 본다면 불원천리 달려가는 그 길에도 나름의 의미와, 자기만의 창조를 위해 나아가는 고단한 발걸음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소재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소재는 매개일 뿐 주제가 아니므로 처음 보면 그럴 듯해 보이고 있어 보여도 가만 보면 아무 것도 없고 평범하고 일상적일 뿐 전혀 새롭지가 않은 것이다. 왜 벽을 채우고 있는 사진들이 보면 볼수록 그때의 감흥과 감격이 되살아 나기는커녕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한가? 바로 소재의 한계인 것이다. 소재는 주제의 발현을 위한 도구일 뿐이지 기록사진이 아닌 한 결코 그것이 주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사진에서는 유독 이렇게 소재주의로 경사될 가능성이 높아 진다. 인물사진에 있어서는, 통속적인 잡지의 표지모델을 찍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면 한 장의 사진 안에 그 사람의 일생을 담을 수 있을까, 어떤 표정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해 줄까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필요한 것은 예쁜 모델이 아니라 바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통찰과 공감인 것이다. 억지웃음을 만드는데 타고난 소질을 가진 사람의 억지웃음을 피사체로 해서 화려한 테크닉과 장비로 그럴 듯하게, 억지가 아닌 양 보이게 또 "만드는" 사진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인물사진을 포기했을까? 예쁜 모델을 살 수 있는 돈이 없기 때문? 너무 적나라 하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돈의 천국.
풍경사진에서는 어떻게 하면 내가 맞이하고 눈으로 보고 탄복해 마지 않는 이 장면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일견 언제나 늘 항상 그러한 듯이 보이지만 매일 보아도 매일 보는 그때마다 다르기만 한 이 장면을 어떻게 하면 마치 그 하나 뿐인 듯이, 그 안에 모든 자연이 들어 있는 듯이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해가 간다. 늘 항상 듣는 이야기, "어느 한 곳을 정해 밤낮으로 수십 수백 번을 방문하고 관찰하라 그러면 그곳에서 사진이 나올 것이다."
무엇을 관찰할 것인가? 일단 빛일 것이다. 빛에 따른 그 곳의 변화와 그 변화가 유발하는 분위기와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변화에 따른 분위기를 통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그 무엇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자연의 광활함과 늘 그러함과 믿음직함, 문명에 찌든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고 그 오만한 인간의 근원이 바로 그 자신, 자연임을 느끼게 해주는 그 거역할 수 없는 힘과 기운에 대한 경외심일 것이다. 때로는 유약하고 고요하며 때로는 거침없고 사나운 늘 스스로 그러함에 대한 일체감과 괴리감. 그것을 보고 읽고 느끼는 만큼 사진은 나올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 선배들이 그리 오랜 동안 헛걸음을 하면서 깨달아 전하는 보석같은 진실을 왜 그 동안 외면하고 있었는지 나 스스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고 본 만큼만 느끼는 것인가?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대답은 된다. 왜 지금까지 내세울 만한 사진 한 장 만들지 못했는지… 개인적으로 소재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게으르기까지 했으니 그런 사진을 만든다면 그것이 불공평한 일이고 설령 무엇을 만들었다고 한들 그것은 스스로에게는 거짓일 뿐인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재 저 소재 어디에는 뭐가 좋고 등등 불빛 만을 쫓아 가는 불나방처럼, 맛을 찾아 전국을 유람하는 겉 맛만 아는 미식가처럼 될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맛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단순한 사물일 지언정 관찰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 것인 모양이다. 지금껏 겉 맛만 대충 알고 쓰다 달다 하면서 촐랑거리고 다녔던 것이다. 마음이 부유하니 무엇이 제대로 보일 것인가?
허면 이 작업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정답이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멀고 인생은 짧다.
소재주의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소재주의란 표현이 있기는 한지부터가 의심스럽지만 일반적으로 주제라고 하는 것이 엄밀하게는 소재가 되는데, 내가 찍고자 하는 주요 피사체, 즉 소재가 자연이랄까 자연풍경이랄까, 아무튼 자연이란 단어가 수식어 또는 명사로 붙는 것들이고 보니 실제 사진을 찍는 일이 생활 주변에서는 의외로 쉽지가 않다.
이 글은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끄적여 둔 순전히 개인적인 글이다. 혹 동일한 오류 속에서 갑갑해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경험과 느낌의 공유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부끄럼을 무릅쓰고 올려 본다.
사진이란 것이 단순한 기록 또는 의사전달의 도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예술과 창작의 새로운 지평인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촬영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셔터를 누르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마치 그림이 기록의 도구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전이되고 의사소통의 도구로서의 글이 읽는 이에게 감동과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라는 예술이 되듯이 사진 역시 단순한 기록의 도구일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은 보는 이 또는 듣는 이, 읽는 이에게 어떤 종류가 되었건 감동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한가지의 감동이나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복합적이면서도 강하고 지속적이고 시종이 일관하거나 나아가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새록새록 새로운 맛과 향이 풍겨나는 그런 감흥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진을 예술, 또는 창작활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진 속에는 본인이 의도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내지는 의미라든가 내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리고 여기서 그 주제를 표현해 주는 매개체가 바로 소재가 된다.
소재주의는 바로 이런 매개체를 찍는 것만으로 주제를 대신하려는 경향 내지는 풍조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겠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사진에 있어서는 특히 이런 소재주의적 경향이 강한 듯이 보인다.
어느 계절이 되면 어디에 무슨 꽃이 피고 어느 계절이 되면 어느 산 어디에 운해가 지고 등등 운해나 꽃, 백로, 폭포, 계곡, 설화, 산능선, 태양 등등의 모든 자연적인 사진소재들이 그 자체로서 사진을 찍는 이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하니 추암으로 남애리로 남해로 등등 전국사방을 돌아다니며 누가 어디 뭐가 좋은 소재가 있다더라 하면 천리길을 멀다 않고 밤을 새어서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물론 창조는 무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나 할 수 있다고 우리가 가정할 수 있을 지언정 유한한 인간의 창조는 과거의 것들에 대한 답습과 모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방도 아주 기가 막히게 모방을 해서 그것이 지루하다고 느낄 때 그 다음에야 그 이전의 창조를 넘어서는 새로움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로 본다면 불원천리 달려가는 그 길에도 나름의 의미와, 자기만의 창조를 위해 나아가는 고단한 발걸음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소재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소재는 매개일 뿐 주제가 아니므로 처음 보면 그럴 듯해 보이고 있어 보여도 가만 보면 아무 것도 없고 평범하고 일상적일 뿐 전혀 새롭지가 않은 것이다. 왜 벽을 채우고 있는 사진들이 보면 볼수록 그때의 감흥과 감격이 되살아 나기는커녕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한가? 바로 소재의 한계인 것이다. 소재는 주제의 발현을 위한 도구일 뿐이지 기록사진이 아닌 한 결코 그것이 주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사진에서는 유독 이렇게 소재주의로 경사될 가능성이 높아 진다. 인물사진에 있어서는, 통속적인 잡지의 표지모델을 찍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면 한 장의 사진 안에 그 사람의 일생을 담을 수 있을까, 어떤 표정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해 줄까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필요한 것은 예쁜 모델이 아니라 바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통찰과 공감인 것이다. 억지웃음을 만드는데 타고난 소질을 가진 사람의 억지웃음을 피사체로 해서 화려한 테크닉과 장비로 그럴 듯하게, 억지가 아닌 양 보이게 또 "만드는" 사진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인물사진을 포기했을까? 예쁜 모델을 살 수 있는 돈이 없기 때문? 너무 적나라 하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돈의 천국.
풍경사진에서는 어떻게 하면 내가 맞이하고 눈으로 보고 탄복해 마지 않는 이 장면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일견 언제나 늘 항상 그러한 듯이 보이지만 매일 보아도 매일 보는 그때마다 다르기만 한 이 장면을 어떻게 하면 마치 그 하나 뿐인 듯이, 그 안에 모든 자연이 들어 있는 듯이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해가 간다. 늘 항상 듣는 이야기, "어느 한 곳을 정해 밤낮으로 수십 수백 번을 방문하고 관찰하라 그러면 그곳에서 사진이 나올 것이다."
무엇을 관찰할 것인가? 일단 빛일 것이다. 빛에 따른 그 곳의 변화와 그 변화가 유발하는 분위기와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변화에 따른 분위기를 통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그 무엇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자연의 광활함과 늘 그러함과 믿음직함, 문명에 찌든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고 그 오만한 인간의 근원이 바로 그 자신, 자연임을 느끼게 해주는 그 거역할 수 없는 힘과 기운에 대한 경외심일 것이다. 때로는 유약하고 고요하며 때로는 거침없고 사나운 늘 스스로 그러함에 대한 일체감과 괴리감. 그것을 보고 읽고 느끼는 만큼 사진은 나올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 선배들이 그리 오랜 동안 헛걸음을 하면서 깨달아 전하는 보석같은 진실을 왜 그 동안 외면하고 있었는지 나 스스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고 본 만큼만 느끼는 것인가?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대답은 된다. 왜 지금까지 내세울 만한 사진 한 장 만들지 못했는지… 개인적으로 소재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게으르기까지 했으니 그런 사진을 만든다면 그것이 불공평한 일이고 설령 무엇을 만들었다고 한들 그것은 스스로에게는 거짓일 뿐인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재 저 소재 어디에는 뭐가 좋고 등등 불빛 만을 쫓아 가는 불나방처럼, 맛을 찾아 전국을 유람하는 겉 맛만 아는 미식가처럼 될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맛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단순한 사물일 지언정 관찰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 것인 모양이다. 지금껏 겉 맛만 대충 알고 쓰다 달다 하면서 촐랑거리고 다녔던 것이다. 마음이 부유하니 무엇이 제대로 보일 것인가?
허면 이 작업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정답이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멀고 인생은 짧다.
출처 : 빛그림 사진여행
글쓴이 : 새벽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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