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본

한 통의 편지, 이케바나와 다도의 추억

릴리c 2009. 9. 4. 18:03

한통의 편지, 이케바나와 다도의 추억
그때, 도쿄 유학시절 료꼬씨가 내게 준 것을 떠올리다
 
최경순 (일본 전문 번역가)
편지!

어쩌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소식이 날아오면 마치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연일 후텁지근한 장마철, 오늘 받은 한통의 편지가 그랬다.

인터넷 세상이 되고난 이후 우리 곁에서 아예 사라진 편지. 이메일이 보편화되어 있는 요즘, 직접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빨간 우체통에 넣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장면이 되었으니 말이다.

편지를 보내준 사람은, 2년 전 서울에서 만난 일본여성이었다.

暑中お見舞い申し上げます。(더운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로 시작되는 문안편지였지만 정성껏 눌러쓴 육필이라는 데에 감동이 일었다. 가끔씩 이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편지지에 적어 보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분위기가 물씬 나는 편지지와 봉투를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유학시절 유미코 씨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인데 ‘일본인 같지 않은’ 유미코 씨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전형적인 일본여성 야마나카 료코(山中良子) 씨다.

내가 도쿄에 있는 동안 일본의 모습을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려 애썼던 사람. 일본적인 편지지와 봉투를 내게 선물하며 오래도록 정을 나누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유미코 씨 집에서였다. 유미코 씨가 나를 초대할 때는 집에 사람들이 모이는 날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해주려는 나름대로의 배려에서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 다정다감한 성품, 눈이 마주치면 환한 미소를 보내던 그녀는 꼭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의 전통문화를 접하고 싶어하는 내게 그녀는 가능한 한 많은 걸 보여주려 했고 소개해주었다. 정식 다도(茶道)와 이케바나(生け花, 꽃꽂이) 모임에 초대해 준 적이 있는데 그 때 마신 말차의 맛과 다실 분위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다도선생이 만들어준 차를 격식에 맞춰 조심스럽게 마시기도 하고 내가 직접 차를 만들어 보며 좋은 시간을 가졌다.  

▲ 다도 선생   ©JPNews

다도에는 여러 유파가 있는데 그녀가 속한 곳은 우라센케(裏千家) 이에모토(家本)로, 센 리큐(千利休, 16세기 일본 다도를 개발하고 이론을 집대성한 사람. 다도를 통해 인간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고 화목의 묘미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가 확립한 다도의 이념이었다.)의 사규(四規; 和·敬·淸·寂-다실의 바람직한 분위기)와 이상적인 다회를 진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인 ‘칠칙(七則)을 원칙으로 삼는다.

칠칙(七則)이란

1. 부드러운 감수성과 평온한 마음으로 맛있는 차를 만든다.
2. 목탄을 이용해 물을 끓인다.
3. 다실의 꽃꽂이는 들판에 피어난 꽃처럼 자연스럽게 장식한다.
4. 여름에는 신선함을, 겨울에는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5. 다회는 정해진 시간보다 다소 이르게 준비해 둔다.
6. 비록 좋은 날씨라도 우산을 준비해 둔다.
7. 주인은 손님의 마음을 헤아려 다회를 진행한다.


료코 씨의 우아하고 품위 있는 태도는 다도와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한번은 자기 집으로 초대해 이케바나(生け花, 꽃꽂이)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나게이레(投げ入れ, 기교를 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은 것같이 자연스럽게 꽂은 꽃꽂이)와 지유바나(自由花)를 마음껏 해볼 수 있었는데, 돌아올 때는 꽃과 화기(花器)까지 함께 싸주어 기숙사 내 방은 한동안 꽃향기로 가득했었다. 
 
▲ 료코씨과 이케바다 /료코 씨가 집으로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녀의 환한 미소가 그립다    ©JPNews

료코 씨의 따뜻한 배려가 나의 지쳐가는 몸과 마음에 향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 향기는 용기가 되어 유학생활 내내 씩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를 이제는 만날 수가 없다.

5년 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었다는데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고 한다. 장례식 전 날 유미코 씨는 내게 전화를 해왔다. 그녀가 나를 각별히 생각했으니 ‘고별사’를 보내달라는 것이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료코 씨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1년 후, 그녀가 사랑했던 가족과 친지들은 ‘료코의 꿈과 친구들 展’이라는 추모전을 열었다. 료코 씨와 가까웠던 친구들, PTA(학부형모임) 등 그녀와 관계했던 사람들은 각자 추억이 될 만한 물품과 작품을 내놓았다.

▲ 료코씨 추모전  /내가 보낸 편지를 액자 두 개에 사진과 함께 전시했다. 그 아래에는 유미코 씨의 설명을 적은 긴 편지
가 있다.   ©최경순

유미코 씨는 내가 보낸 고별편지를 사진과 함께 액자에 넣어 전시장에 걸어주었다. 그 아래에는 유미코 씨 특유의 필체로 우리 두 사람의 만남과 친분에 대한 소개글을 써놓아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의 이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 료코씨 추모전   ©JPNews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지만 내 가슴에 고여 있는 료코 씨에 대한 추억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다. 컴퓨터가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으면서부터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글씨 쓸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이번 여름, 편지 한 통으로 받은 감동이 파문처럼 번지도록 격조했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볼 생각이다.

이 여름이 다가기 전에 도쿄에 갈 예정이다.

'료코! 당신이 준 편지지에 내 마음을 담아 당신이 잠든 곳을 찾아갈게요!' 


 
▲  료코씨와 다도     ©JPNews
▲ 료코 씨 추모전 내편지...사진... 료코 씨가 선물했던 편지지...     ©J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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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8/01 [01:14]  최종편집: ⓒ 제이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