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한

월간조선 '18.3월호/팝송도사 DJ 김광한 후손들 “김밥 좋아하던 ‘김POP’, DJ 김광한”

릴리c 2018. 3. 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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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도사 DJ 김광한 후손들 “김밥 좋아하던 ‘김POP’, DJ 김광한”


⊙ 5남 2녀의 넷째로 서울에서 출생. AFKN 즐겨 듣던 큰형 영향으로 팝송 입문
⊙ 어머니 사망 후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종일 팝송 심취
⊙ 대학 2학년(서라벌예대) 때 ‘19살 DJ’로 서울FM 방송 국내 최연소 팝송DJ가 되다!
⊙ 최고의 팝송DJ. TV프로인 〈쇼 비디오 자키〉 〈가요 톱10〉 MC로 활약
⊙ ‘Can’t help Falling In Love’는 가장 좋아하는 팝송… 아내 최경순에게 프러포즈하며 불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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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김광한.

386세대라면, 1970~90년대 팝송을 즐겨 들었던 올드팝 팬이라면 KBS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미국과 영국 중심의 팝음악이 국내 상륙할 때 길잡이로 활약했던 이가 DJ 김광한(金光漢·1946~2015)이다.
 
  국내 팝음악 전문 DJ 1세대가 최동욱, 이종환(작고), 박원웅(작고)이라면 김광한, 김기덕은 1.5세대 내지 2세대다. 김광한은 서라벌예대(지금의 중앙대) 방송과에 재학 중이던 1965년 ‘서울FM 방송’에서 DJ 겸 PD, 그리고 ‘판돌이’(레코드판을 갈아주는 사람)로 데뷔했었다.
 
  당시 서울FM 라디오의 주파수는 89.1Mhz. 이 주파수는 지금 KBS 2FM이 쓰고 있다. 서울FM은 훗날 TBC(동양방송)로 넘어갔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흡수됐다. 어쩌면 KBS 음악FM의 원조 내지 뿌리 진행자가 김광한이었다.
 
김광한은 서라벌예대 방송과에 다니다 국내 첫 FM 방송인 서울FM 방송 임시직원(오른쪽)으로 재직하다 정식 DJ 겸 PD가 됐다. 1965년 2월 무렵이다.
  1980~90년대 팝송DJ 김광한의 인기는 요즘 예능에 출연하는 방송 아나운서에 버금갔다. 나름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라디오와 TV를 종횡무진 했다. 이유는 뭘까. 당시 팝송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198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마이클잭슨, 마돈나, 신디로퍼, 왬, 컬처클럽, 스티비 원더, 라이오넬 리치, 듀란듀란, 아하 등이 나타나 전 세계 팝시장을 휩쓸었고 그 물결이 국내로 이어졌다. 공테이프가 모자라 영어회화 테이프에다 녹음을 해댔고 라디오를 듣다 좋은 음악이 들리면 카세트 ‘REC’ 버튼을 거듭거듭 눌렀다. 라디오 방송 프로에 신청곡을 틀어달라는 엽서가 쇄도했던 것도 그 시절이다.
 
  당시 인기 라디오 음악 프로를 꼽자면 MBC FM은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별이 빛나는 밤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KBS FM은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전영혁의 음악세계〉 등이 있었다. MBC FM이 청취자 사연 위주의 대중적인 팝송을 선호했다면, KBS FM은 보다 전문적인 음악 친화적 방송이었다. KBS DJ 중에서도 김광한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고루 끌어안았다고 할까.
 
  이후 김광한은 DJ에서 브라운관 MC로 영역을 넓혀 KBS 〈쇼 비디오 자키〉 〈가요 톱10〉의 진행자로 활약했다.
 
  1993년 4월 KBS를 떠난 뒤에도 경인방송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며 현장을 지켰고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2015년 7월 심장마비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작년 10월 생전 김광한이 쓴 유고(遺稿) 발견
 
고 김광한의 부인 최경순 씨.
  김광한은 건설업을 하던 김선용(金善用·1906~1969)과 아내 김다복(金多福·1913~1962) 슬하의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맨 위에 맏형이 있었으나 6·25 때 국군 장병으로 전사했다. 현재 동작동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첫째 창한(金昶漢·1936~1993)과 둘째 응한(金應漢·1938~2006)은 이미 사망했다. 김광한은 큰형(김창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창한은 학창시절, 주한 미군방송인 AFKN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했는데 팝송도 늘 함께 들었다고 한다. 열 살 아래인 동생 김광한이 귀를 쫑긋 세워 팝송을 들었을 게 틀림없다.
 
  셋째 웅구(金熊久·1941~), 다섯째 영희(金英喜·1948~), 여섯째 영숙(金英淑·1951~), 일곱째 일한(金一漢·1954~)은 현재 생존해 있다. 이들 중에, 그리고 이들 후손 중에 문화예술인으로 현재 활동 중인 이는 없다고 한다.
 
  김광한은 아내 최경순(崔慶順· 1954~)과 1979년 결혼했다. 첫 만남은 77년. 김광한이 음악다방을 전전하며 DJ를 하던 시절, 음악감상 클럽 ‘돌멩이’의 회지 발행 일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평생 오누이처럼 신혼으로 살았다. 김광한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최경순은 남편의 부재를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사후 2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세상에 얼굴을 내밀려 한다.
 
  기자는 고인의 ‘음악 아지트’였던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한 지하실을 최씨와 함께 찾아갔다. 1만 장이 넘는 LP판과 CD, 음향기기, 낡은 전축과 앰프, 턴테이블, 각종 음악서적들이 먼지와 함께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생전에 쓴 유고를 보여주었다. 작년 10월 고인의 후배인 박현준씨가 우연히 유고를 발견했다고 한다. 박씨는 현재 경인방송의 팝 전문 프로인 〈라디오 가가〉의 DJ 겸 PD. 유고의 첫 장에는 김광한이 직접 쓴 자필 약력이 나온다.
 
  〈…이름 : 김광한
  취미 : 영화·연극 관람. 축구도 관심 많음.
  혈액형 : O형.
  별명 : 김밥, 열일곱 살 아저씨 DJ.
  좋아하는 가수 : 기타리스트 엘모어 제임스, 국내 가수는 김하정.
  음주와 흡연 : 술은 거의 안 하고 담배는 하루 한 갑 피웠으나 20년 전에 끊었음.
  좋아하는 음식 :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만든 김밥.
  성격 : 감동 잘하고 눈물 잘 흘림.
  체력 : 100m 12초에 주파, 체력도 17세.
  좌우명 : 건강, 성실, 이해…〉
 
  (이 글은 김광한이 마흔일곱 되던 1993년 무렵 쓴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자).
 
 
  별명은 ‘김밥’ ‘열일곱 살 DJ’
 
  최경순씨는 남편이 팝송에 빠져들게 된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남편의 큰형이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대요.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안이 부자여서 전축이니 해외 LP 원판을 엄청나게 수집했나 봐요. 어린 시절 남편은 귀동냥으로 들은 팝송을 평소에 흥얼거렸고 아마 그 영향으로 DJ라는 꿈을 꿀 수 있었을 겁니다. 또 국내가요도 즐겨 들었고 당시 유행하던 트위스트 춤도 잘 추었다고 해요”
 
  ― 유고에 보면 별명이 ‘김밥’ ‘열일곱 살 DJ’라고 적혀 있네요.
 
  “‘열일곱 살 DJ’는 한 여고생 애청자가 남편이 늘 젊게 산다고 해서 붙인 별명인데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봐요. 곧잘 ‘아무리 나이 먹어도 열일곱 살 아저씨로 살겠다’고 다짐하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김밥’은 ‘POP(밥)의 도사 김광한’이라는 뜻으로 역시 청취자가 만들어 주었대요. 또 실제로 김밥을 좋아했고요.”
 
  최씨는 “남편이 유년시절 서울 낙원동 골목길을 누비던 골목대장이었다”고 말했다. 근처에 있던 극장(문화극장) 티켓을 사지 않아도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극장표를 받는 이가 ‘종로 깡패’ 김두한의 부하들이었는데 낙원동 앞뒷집으로 이웃해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안동 김씨)도 같았다. 김두한과 김광한의 아버지 김선용이 서로 교류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내 최씨의 말이다.
 
  “남편 유고를 읽어 보니 당시 극장에서 영화 〈아리랑〉과 〈자유부인〉을 봤다고 해요. 〈아리랑〉은 나운규 감독 작품이 아니라 장동휘의 〈아리랑〉이었대요. 버트 랭커스터의 〈진홍의 도적〉, 커크 더글러스와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OK목장의 결투〉나 〈유성 같은 사나이〉 같은 서부영화도 봤답니다. 낙원동은 남편에게 정말 ‘낙원’이었대요.”
 
  그러나 아버지 김선용이 1969년 6월 갑자기 사망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만다. 벌여놓은 사업을 정리하고 빚을 갚으니 ‘알거지’가 됐다. 최씨는 “남편을 포함해 7남매가 친척 집이나 친구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 그때 집 안에 있던 LP판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당시 남편은 월남 파병을 갔었대요. 제대해 집으로 가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어머니의 사망 이후 더욱 팝송에 빠져들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김광한.
  최경순씨는 “남편이 팝송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한 여가수가 부르는 팝송에 완전히 매료됐는데 가수 이름은 송영희 혹은 ‘신디 송’.
 
  송영희는 1950~60년대 주한 미군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던 가수였다. 베트남에 위문공연을 갔다가 미군 종군기자를 만나 결혼한 뒤 이민을 갔다. 그 종군기자가 바로 1970년대 미국 포드 대통령의 대변인을 지낸 론 네슨. 그녀는 1980년대 세계적 화장품 브랜드인 ‘에스티 로더’를 한국에 소개한 여성 사업가로 변신했다. 최씨의 말이다.
 
  “남편이 고2 때 쇼 구경을 갔다가 여가수가 부르는 팝송에 완전히 빠져버렸는데 그가 송영희입니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였던 그녀는 거의 팝송만 불렀는데 너무나 잘 불렀다고 해요. 남편이 송영희를 만나고 싶어 했는데 때마침 시아버님이 동대문극장을 인수했어요. 남편이 극장주의 아들이 된 셈이죠. 그 덕에 송영희를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악수도 하고 기념촬영도 했대요.”
 
1983년 내한한 그룹 퀸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운데)와 베이시스트 존 디콘과 함께.
  그 무렵인 1962년 12월 김광한의 어머니가 사망, 사춘기 소년은 더욱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고3 때에는 학교에 가는 날보다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오래도록 으르렁거리며 방황하던” 시절,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큰형의 전축을 아예 그의 방으로 옮겨놓고 하루종일 꼼짝 않고 레코드판을 듣는 날이 많았다. 최씨의 말이다.
 
  “남편이 남긴 글을 보면, 당시 클라리넷 연주자인 애커 빌크의 ‘스트레인저 온 더 쇼어(Stranger on The Shore)’를 즐겨 들었고, 카니 프란시스의 ‘마마(Mama)’를 들으며 눈물 흘렸다고 합니다. 폴 앵카의 ‘마이 홈 타운(My Hometown)’이나 ‘크레이지 러브(Crazy Love)’, 앤 마그렛의 ‘홧 앰 아이 서포즈 투 두(What Am I Suppose To Do)’, 클리프 리처드의 ‘더 영 원(The Young ones)’ ‘레슨스 인 러브(Lessons In Love)’ ‘웬 더 걸 인 유어 암스(When The Girl In Your Arms)’,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들과 클라리넷 연주곡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당시엔 팝을 알거나 좋아해서라기보다 자신만의 사색 공간으로 빠져들기 위한 일종의 배경음악으로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 김광한의 아버지는 방황하는 아들에게 기타를 사주었다. ‘작은 오케스트라’인 기타는 반항 소년을 사로잡았다.
 
  1965년 서라벌예대 방송과에 진학한 김광한은 그 무렵 확실하게 팝송에 심취해 있었다. 라디오 방송도 거의 팝송프로만 들었다. 당시 DBS(동아방송. 1963년 4월 개국한 국내 두 번째 민간상업방송) 음악 프로였던 〈최동욱의 탑튠쇼(Top Tune Show)〉, 그리고 ‘미국의 소리’(VUNC : Voice of United Nations Command) 방송에서 유영옥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퍼스트 쇼(First Show)〉를 자주 들었다. 최씨는 “남편이 〈최동욱의 탑튠쇼〉를 들으며 막연하게나마 DJ 꿈을 꾸게 됐다”고 말했다.
 
 
  병아리 장사, 고철이나 폐지 수집, 음악다방 DJ까지
 
김광한의 20~30대는 인생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고생하던 시기다. 경북 김천에서 중병아리를 사다가 등에 짊어지고 서울과 수도권 등지를 돌며 팔았다. 아이들에게 병아리를 파는 모습이다. 당시 몸은 고됐으나 꽤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해(1965년) 6월 ‘서울FM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초단파를 사용하는 FM방송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라벌예대 시간강사였던 한용희(훗날 방송심의위원회 심의위원이 되었다)의 권유로 김광한은 재학 중 서울FM 임시직원이 될 수 있었다. 최씨의 말이다.
 
  “남편이 한 일은 ‘레코드 플레이어’였는데 그땐 시험방송이어서 아무런 멘트 없이 그저 레코드만 틀었어요. 그 일로 DJ가 되는 기초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대요. 왜냐면 어떻게 레코드판을 관리하는지, 바늘을 어디쯤 놓아야 자기 의도대로 음악이 시작되는지, 음향 기기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게 됐으니까요.
 
  가끔 선배들의 숙직을 대신 서다가 녹음기를 작동시켜 놓고 ‘DJ 최동욱’ 흉내를 내곤 했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정식 DJ 겸 PD로 발령받았다고 해요. 남편은 ‘대학 2학년의 학생 신분으로 19세 때 국내 최연소 팝송DJ가 됐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디까지나 비공인 기록이지요.”
 
  어쨌든 ‘19살 DJ’ 김광한은 서울FM에서 매일 1시간씩 〈FM 히트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격일 2시간짜리 음악 프로 〈뮤직 다이얼〉까지 맡게 됐다. 둘 다 청취자로부터 전화도 받는 생방송이었다. 당시 라디오를 들으려면 ‘FM 수신기’를 달아야 했기에 청취자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씨의 말이다.
 
  “‘19살 DJ’ 시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어요. 서울FM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TBC(동양방송)에 인수됐지만 직원들은 기술직 단 한 명만 채용하고 나머진 고용 승계를 하지 않았어요. 남편은 DJ 꿈을 당분간 접어야 했지요.”
 
  월남전에 정훈보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제대(1970년)한 뒤 김광한은 별의별 고생을 다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가장 압축적으로 20~30대 때 보낸다. 그러나 음악과 DJ에 대한 꿈은 꺾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의 말이다.
 
  “(남편이) 제대 후 열여섯 가지 직업을 가졌다고 해요. 부산에 내려가 라디오 방송국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한동안 실내 사격장 사환으로 일한 적도 있어요.
 
  다시 상경해 신문배달도 하고 양키 물건을 떼다가 팔았는데 틈틈이 음악다방 DJ도 했대요. 다방 손님들에게 사주 관상도 봐주고, 은단도 팔았다고 합니다. 또 보험회사 외판원을 했는데 단숨에 판매고를 올려 2등 상을 받았대요.”
 
  또 서른 살이던 1976년 김광한은 《주간 시민》의 방송담당 기자로 취직해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글을 썼다. 그러나 갑자기 편집국 대신 보급부(신문판매 기획과 판매담당 부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고민하다 사표를 쓰고 말았다.
 
  “주간지 기자를 그만두고 ‘병아리 장사’를 했는데, 경북 김천에서 중병아리를 사다가 등에 짊어지고 서울과 수도권 등지에서 팔았대요. 고되고 힘들었지만 꽤나 수지맞는 장사였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 고철이나 폐지를 수집하는 일도 했고 음악다방을 돌며 LP판을 공급해 주는 일도 시작했어요.”
 
 
  KBS 떠나며 튼 마지막 팝송은 존 마일스의 ‘Music’
 
젊은 시절, DJ 김광한. 그가 방송국 DJ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78년 MBC FM 〈박원웅과 함께〉에 출연하면서부터다.
  김광한이 방송국 DJ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78년 MBC FM 〈박원웅과 함께〉에 출연하면서부터다. 흑인 음악인 ‘블루스’에 대해 해박한 음악지식을 쏟아내 DJ 박원웅과 담당 PD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최씨의 말이다.
 
  “그때 게스트 직함은 ‘경음악 평론가’였어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사흘 연속 출연을 했는데 팝송지식도 지식이지만 남편이 고물상을 하며 수집한 1940~50년대 블루스 음반을 보고 박원웅씨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해요. 그때 소개한 가수가 밥 딜런(Bob Dylan)의 선생님 격인 라이트닝 홉킨스(Lightnin’ Hopkins)였어요. 국내 전혀 소개되지 않은 뮤지션이니 놀랄 수밖에요.”
 
  김광한은 MBC로부터 〈박원웅과 함께〉의 고정 게스트와 스크립터로 일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얼마나 줍니까?”
 
  DJ 박원웅은 깜짝 놀랐다. 방송에 출연만 시켜줘도 고마워해야 할 풋내기가 건방져 보였던지, 아니면 의외로 당당해 보여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출연료가 엄청났다. DJ들의 1회 출연료가 2만원일 때, 김광한은 주말 하루만 원고를 써주고 출연해서 받는 돈이 5만원이었다.
 
  이후 그는 TBC DJ를 거쳐 KBS에서 정식 DJ가 될 수 있었다. 1981년 1월 KBS 2라디오의 〈2시의 다이얼〉로 시작해 이듬해 10월 KBS FM 〈팝송 다이얼〉을 거쳐 1983년 1월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KBS 2FM)의 DJ가 됐다.
 
  한국 최초의 종합연예지 《TV 가이드》의 1983년 인기 DJ 순위에서 그의 이름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84, 85년에도 1위였다.
 
  1987년 KBS 코미디 프로인 〈웃음꽃방〉이 시청률 바닥을 맴돌자 라디오 DJ 김광한을 TV 진행자로 발탁, 〈김광한의 비디오 코미디 쇼〉가 전파를 탔다. 이 프로는 4개월 후 〈쇼 비디오자키〉로 바뀌었는데 코미디 프로 최초의 공개방송이었다.
 
  이후 4년 동안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김광한은 그 덕에 ‘팔도라면’ CF도 찍었다. 1991년에는 우리 가요를 다루는 순위 프로인 〈가요 톱10〉의 MC로 활동했다. 팝송 전문 DJ가, 생전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못생긴 김광한”이, 공중파 방송 MC에 발탁됐다는 사실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불꽃이 너무 화려했을까. 1993년 4월 30일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은 11년 90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김광한은 KBS를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그의 방송멘트는 이랬다.
 
  〈…아름다운 세상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순수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은 음악을 자주 들을 때 생겨나지 않을까요? 음악을 많이 들으십시오. 김광한은 언제나 ‘열일곱 살 아저씨 DJ’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는 애청자에게 “음악을 많이 들어라”고 권했고, 자신은 ‘열일곱 살 DJ’로 남겠다고 약속했다.
 
  김광한이 〈팝스 다이얼〉 종영 방송의 마지막으로 튼 곡은 존 마일스의 ‘뮤직(Music)’이었다. 이 곡은 그가 1980년 4월 TBC 〈탑튠쇼〉로 공중파 음악방송 DJ로 공식 데뷔할 때 틀었던 첫 곡이기도 하다.
 
  ‘Music was my first love, and last love…(음악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김광한은 이후 CBS, 교통방송, 경인방송 등지에서 여전히 현역 DJ로 활동했다. 그러다 2015년 7월 9일 심장마비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최씨의 말이다.
 
  “팝송DJ 시절, 남편은 수입의 80~90%를 자료 모으는 데 썼어요. 저축이란 걸 몰랐어요. LP와 CD를 구입했고 닥치는 대로 음악 관련 자료를 모으고 스크랩을 했어요. 옆길, 한눈팔지 않고 오직 한길만 걸었어요.”
 
  ― 바가지를 많이 긁지 않았나요.
 
  “거의 바가지 안 긁었어요. 긁을 게 뭐가 있나요? 남편은 젊은 시절 고생도 많았지만 그래도 음악과 함께 원 없이 살았어요. 음악에 대한 욕심 빼고 물질적 욕심, 이런 것 전혀 없었으니까요.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인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돈을 많이 못 벌어줘서 미안하다고요.
 
  남편이 쓰러지고 의식이 없었을 때, 제가 남편 손을 잡고 ‘당신 인생, 잘 살았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랬어요. 남편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올라오더라고요. 그러곤 임종을 했습니다.”
 
  최씨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악을 물어보셨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혼 전 제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불러준 노래가 있어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면서요.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캔 헬프 폴링 인 러브(Can’t help Falling In Love)’입니다. 지금은 제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음악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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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8-03-01 오전 9:27:00   |  수정일 : 2018-02-28 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