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한

월간조선, 라디오 세대의 퀸앓이 추억/김태완기자

릴리c 2018. 12. 31. 11:40

라디오 세대의 ‘퀸 앓이’ 추억

“웃어라 광대여. 그대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라디오 세대와 2030세대의 록음악 동거… 직장인 밴드 재결성, 악기 판매 늘어
⊙ ‘음악산업은 불경기에 성장한다’ 법칙 증명
⊙ 1984년 퀸 멤버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 來韓…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100분쇼〉에 출연
⊙ “퀸 음악은 대중가요보다 팝 음악을 먼저 접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등용문과 같아”(록밴드 H2O의 보컬 김준원)

DJ 김광한과 내한한 퀸 멤버 로저 테일러(가운데)와 존 디콘.
1984년 3월 31일 KBS 〈100분쇼〉에 출연한 모습이다.
  4인조 영국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역대 음악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다. 누적 관객 수 713만8188명(12월 12일 현재). 외화 〈레미제라블〉 〈맘마미아〉의 기억을 밀어내 버렸다.
 
  10월 31일 첫 개봉해 상승곡선이 지칠 줄 모른다. 2D버전, 스크린X, 싱어롱 버전(떼창 관람) 등으로 영화를 2~3차례 봤다는 이가 즐비하다. 이런 흥행은 퀸 본거지인 영국을 위협할 기세다. 흘러간 옛 노래였던 퀸 음악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그것도 한국에서 빚어지는 것일까. 언제부터 한국인이 록음악을 즐긴 것일까. 기자는 음악 전문가들에게 기(奇)현상을 묻기 앞서 ‘자기 고백’부터 하리라 마음먹었다.
 
  분지(盆地)의 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늘 생각했다. 삶 속에 검은색 공과 흰색 공이 섞여 있다고, 여러 진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든 뭐든 결국엔 따라잡히거나 병들게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등하교 쳇바퀴를 돌리며 하루라도 음악을 듣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즈음, ‘마이 마이(my my)’라는 포터블 카세트라디오가 등장했을 때 얼마나 열광했던지….
 
  매일 아침 비소(팝송)를 조금 먹으면 저녁까지 버틸 수 있었고, 저녁에 돌아와 다시 조금 먹으면 자정까지 버틸 수 있었다. 미량의 비소는 중독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학교 성적은 간혹, 때때로, 급기야 곤두박질쳤다.

 
  나이 들어 생각하니, 만약 그때 비소 먹는 일을 멈췄다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전혀 후회는 없다. 그때 먹은 비소의 시린 감수성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것이 인생이니까. 신(神)은 공평하시니….
 
  일요일이면 대구 푸른다리(신천철교) 근처 노상에서 팔았던 LP 백판을 사기 위해 서성였다. 주머니가 텅텅 비어 ‘눈 호강’만 했다. 실은 집에 전축이 없었다. 그때 샀던, 나중 친구에게 넘긴 ‘더밴드(The Band)’의 두 장짜리 앨범이 기억에 남는다. 앨범 타이틀은 기억 속에 없다.
 
  팝송 전문잡지인 《월간팝송》을 읽었고, 일본 음악잡지를 구하기 위해 대구역과 남문시장 주변 헌책방을 돌던 기억도 새롭다. 일본 잡지의 종이 질은 《월간팝송》과 달리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월간팝송》 종이는 과장해서 말해 마분지였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택해 일본어는 전혀 몰랐다. 팝스타의 사진을 본다는 것에 기꺼이 환호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갖게 된 손바닥만 한 방 벽에 온통 팝스타의 사진을 붙였던 기억도 난다. 그때 교대생이던 큰누나가 내 방에 들어와 지었던,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도 생각난다. 온통 뒤죽박죽 엉망이던 학창시절이었다.
 
 
  처음 산 앨범 〈The Works〉… 퀸에 빠져들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 관객수 700만명을 돌파, 역대 음악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여러 팝스타를 좋아했지만 특히 좋아하던 가수는 퀸이었다. 그때 ‘퀸 앓이’가 사춘기의 첫 진통이었다. 비틀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사바스 같은 밴드를 좋아했지만 퀸에 미치지 못했다. 오직 퀸이었다. 친구들에게 퀸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친구들은 마이클잭슨이나 마돈나에 더 흥분했다. 대부분 팝송에 별 관심이 없었다.
 
  처음 산 퀸 앨범은 1984년에 발매된 〈더 웍스(The Works)〉였다. 이 앨범 수록곡들이 다 좋았다. ‘라디오 가가(Radio Ga Ga)’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I Want To Break Free)’ ‘잇츠 어 하드 라이프(It’s A Hard Life)’ ‘맨 온 더 플로어(Man on The Prowl)’ 등을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이 중 딱 한 곡만 고르라면 아마도 ‘잇츠 어 하드 라이프’리라. 프레디 머큐리의 가슴 저미는 발라드였다. 그 무렵, 대구MBC 라디오에 엽서를 보냈다. 신청곡은 ‘맨 온 더 플로어’를 적었다. ‘잇츠 어 하드 라이프’를 적지 않았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선 안 되니까.
 
  ‘잇츠 어…’에 나오는 강렬한 서두의 가사는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유명한 오페라 ‘팔리아치(Pagliacci)’의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에 나오는 ‘웃어라 광대여. 비록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웃어라 광대여’를 재연하는 것 같았다.
 
  앨범 〈더 웍스〉 이후 퀸 앨범을 차례로 들었다. 국내 발매 라이선스 앨범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없었다. 금지곡이었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처음 들었다. 첫 느낌은 ‘이게 뭐지?’였다. 가사 중 ‘스카라무쉬, 스카라무쉬, 윌 유 두 더 판단고? 선더볼트 앤 라이팅 베리 베리 프라이팅 미. 갈릴레오 갈릴레오, 갈릴레오 피가로, 매그니피코-오-오-오’(Scaramouche, Scaramouche, will you do the Fandango? Thunderbolt and lightning, Very very frightening me. (Galileo) Galileo. (Galileo) Galileo. Galileo Figaro Magnifico-o-o-o)라고 외치는 코러스에 놀랐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이 노랫말이 이렇게 해석되고 있음을 알고 또다시 놀랐다.
 
  ‘겁쟁이, 겁쟁이, 넌 판당고 춤이나 출 거니? 천둥 치고 번갯불이, 너무너무 날 두렵게 하는데.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날 구하소서.’
 
  퀸의 수많은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은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불렀던 ‘’39’이었다. 이 노래는 그들의 4번째 앨범 〈한밤의 오페라(A Night At The Opera)〉에 실렸다. 퀸 팬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브라이언 메이는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뮤지션이 되지 않았다면 미국 나사(NASA)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았을까. ‘’39’은 우주여행에 대한 노래다. 가사를 거칠게 번역하면 이렇다.
 
  ‘○○39년, 그 무렵 우주 비행사들이 조직되었죠. 땅이 메말라 가던 어느 날, 우주선은 푸르고 맑은 아침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어요.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밤이 낮을 따라 떠났어요. 오랜 외로운 시간 동안 은하수를 건너 돌아보지 않고, 겁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죠.
 
  수백광년 떨어져 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제가 당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모래 속에 당신의 편지를 묻었죠. 당신의 손을 잡기 위해, 우리의 손주들이 알았던 그 땅으로, ○○39년째 되는 날 하늘에서 돌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구는 이미 늙고 잿빛으로 변했고 날 반겨주는 건 늙은 손녀뿐.’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와 보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시간 팽창’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죽어 있더라는 슬픈 내용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1914년 소설 《더 리버(The River)》에 기초한 가사로 알려졌다.
 
  그렇게 ‘’39’을 들으며 사춘기 ‘퀸 앓이’를 했다. 《월간팝송》 과월호를 통해 퀸의 두 멤버(존 디콘, 로저 테일러)가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월호를 구해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 기억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30년 이상 시간이 흘렀으니까.
 
 
  존과 로저의 來韓을 전한 《월간팝송》 1984년 5월호
 
1984년 3월 30일 내한한 퀸의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가 음악잡지 《월간팝송》을 읽고 있다. 이 사진은 《월간팝송》 1984년 5월호에 실렸다.
  문득 퀸 멤버의 내한 소식을 전한 《월간팝송》 1984년 5월호가 궁금했다. 도서관에서 누렇게 변색된 옛 잡지를 빌렸다. 그리고 두 눈으로 확인했다.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는 듯했다. 기사 앞부분만 인용해 본다.
 
  〈… 현대 브리티시 록 전통을 잇는 정상의 록그룹 퀸의 멤버인 로저 테일러와 존 디콘의 방한소식이 확정된 것은 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나마 약 20여 차례의 텔렉스가 오가면서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를 포함한 방한 일정이 잡힌 직후 ‘100분 쇼’를 생방송하기로 했던 KBS 측이 돌연 녹화로 방침을 변경, 행여나 이들이 방한을 취소하지 않을까 하고 관계자들을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3월) 30일 밤 9시25분 록의 여왕 퀸의 두 멤버는 예정대로 김포공항에 안착했다.
 
  본지(《월간팝송》) 기자 일행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도착 시간과 비행기편까지 정확히 알아낸 국내 팬들(대부분이 여고생들이었다)이 이미 외국인 전용 출구에 몰려와 있었는데 퀸 멤버들이 입국 수속을 하느라 10시경까지 나타나지 않자 발을 구르며 초조해하던 그들은 본지 취재팀을 보고 환성을 지르는 바람에 우리 일행은 공항에서 본의 아니게 뜨거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DJ 김광한의 생전 모습. 팝 음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한 광고에 출연한 김광한의 모습이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로저와 존이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 출구는 그들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주고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달려들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듯싶었다. “땡큐”를 연발하며 출구를 빠져나온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두 대에 경호원과 함께 분승,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숙소인 신라호텔을 향해 출발한 차내에서 한국에 온 기분이 어떠냐는 기자의 첫 질문에 “Very Fine!”이라고 찬탄하는 로저는 생각대로 매우 세련된 용모에 사춘기의 소녀라면 가슴이 탁 막힐 정도의 멋진 모습이었고 검은 안경을 쓰고 창밖의 서울 거리를 살펴보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p54~55, 《월간팝송》, 1984년 5월호)
 
  내한 당시 퀸의 로저와 존은 KBS 라디오 프로인 〈김광한의 팝스다이얼〉과 KBS TV 〈100분쇼〉에 출연했다. 〈100분쇼〉에는 김광한도 초대됐다. 당시 인터뷰 내용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전설적인 DJ 김광한은 2015년 7월 9일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부인 최경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씨는 김광한과 찍은 퀸 멤버 사진을 보내주었다. “남편이 〈100분쇼〉에서 존과 로저 두 사람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다.
 
  “당시 남편이 아주 고가(高價)의 장비였던 레이저 디스크를 일본에서 사왔었어요. 그땐 뮤직 비디오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걸 가지고 전국을 돌며 청취자들을 만나곤 했어요. 레이저 디스크에 담긴 영상을 틀어주면 팝 팬들의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남편이 구입한 레이저 디스크 중에 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돼요.
 
  남편은 퀸 앨범을 거의 다 갖고 있었어요. 저도 퀸 음악을 좋아하는데 한 곡만 꼽으라면… 글쎄… 다 명곡인 것 같아요. 아직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못 봤어요. 빨리 봐야 하는데….”
 
 
  퀸 노래 ‘Radio Ga Ga’를 라디오 프로그램 타이틀로!
 

  DJ 김광한의 후배인 DJ 겸 PD인 경인방송의 박현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매일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박현준의 라디오 가가〉(90.7MHz)라는 팝송 전문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고 있다. ‘라디오 가가’는 바로 퀸의 히트곡이다. 퀸 노래를 프로그램 타이틀로 정한 것이다.
 
  ―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 타이틀이 퀸 노래네요.
 
  “그러니 퀸을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퀸으로 인해 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까요? 2006년 4월 프로그램을 개편할 때 〈라디오 가가〉라는 이름으로 바꾼 뒤 지금까지 13년째 같은 이름을 쓰고 있으니까요.”
 
  ― ‘라디오 가가’를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프로그램 개편을 앞두고 이름(타이틀)을 고민하고 있었죠. 아이디어를 짜내어 (방송)국장님께 보고했으나 번번이 고개를 저으셨어요. 어느 날 퀸의 ‘라디오 가가’를 틀었더니 국장님께서 ‘그걸로 가자’고 하셨어요. 그러니 제가 퀸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죠.”
 
  ― 요즘 퀸이 한국에서 뜨거운 이유가 뭘까요.
 
  “본질적으로 퀸 음악에 대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요? 1971년 데뷔 이래 시대변화에 따라 퀸은 변신했고 때로 시대변화에 앞섰어요.”
 
  ― 고 김광한 선생님은 퀸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퀸 음악에는 라디오 세대의 추억이 담겨 있지만 퀸은 영상 세대와 친숙해요. 한국의 비디오자키(VJ) 1호가 김광한입니다. 전국을 돌며 뮤직비디오를 많이 틀었는데 아하, 듀란듀란, 컬처클럽과 함께 퀸도 열심히 소개하셨어요. 영상음악의 한 축으로 퀸을 소개하는 데 일조한 이가 선생이 아닐까요?
 
  사실 퀸은 당시 국내에서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어요. 동성애 코드가 있었고 문화적으로 한국인에게 조금은 이질적이었죠. 퀸의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I Want To Break Free)’의 여장(女裝) 뮤직비디오처럼 경망스럽다고 할까요? 그러나 〈팝스다이얼〉 같은 라디오 프로에서 퀸 발라드인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를 열심히 틀었어요. 이 곡은 국내에서 유독 인기가 많았습니다. 4050세대들에게 ‘퀸 앓이’를 안긴 노래죠.”
 
 
  퀸 신드롬의 진짜 이유는…
 

  록밴드 H2O의 보컬 김준원씨도 퀸 광팬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전해왔다.
 
  “저는 항상 노래의 힘이 뮤지션보다 거대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뮤지션이 사라진 후에도 좋은 곡들은 오래오래 살아남기도 하죠. 6여분짜리 ‘보헤미안 랩소디’ 역시 그런 곡이죠.
 
  이 곡엔 서정적 발라드, 헤비한 록 리듬, 클래식한 오페라, 멋진 코러스… 굳이 록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좋아할 수 있는 매우 유니크한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과감하게 만든 도전정신, 타협 없는 반항의식… 이런 바탕이 프레디 머큐리의 전성기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까지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죠.”
 
  ― 왜 2030세대들이 1970~80년대 밴드인 퀸에 열광할까요.
 
  “1970~80년대 당시 슈퍼 밴드들은 지금의 밴드들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말하자면 레드 제플린, 롤링스톤스, 퀸 같은 밴드는 지금의 브릿팝(영국 팝) 밴드인 콜드플레이와는 달랐다는 거죠. 이들은 음반판매, 공연흥행 모두 톱이었습니다.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톱10곡이 한두 곡씩 나오는, 그야말로 팝 음악의 전성기를 구가했죠. 당시를 모르는 2030세대들은 퀸의 여러 음악이 신선하게 느껴질 겁니다. 요즘 열광하는 뮤지션들과는 다른….”
 
  대중음악평론가 고종석씨는 4050세대들이 좋아했던 퀸의 전성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성기는 1980년대 전반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국내 대중음악의 취향은 가요 못잖게 팝 음악, 특히 장르적으로 록에 열광하고 있었어요.
 
  또 신중현을 먼저 알고 레드 제플린에 빠져들기보다, 에릭 클랩튼이나 제프 벡의 음악을 듣다가 국내 음악으로 접어드는 경향이 강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퀸 음악은 대중가요보다 팝 음악을 먼저 접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등용문과 같았죠. 그리고 그 선택은 시대와 관계없이 여전히 이루어져 왔고 그 흐름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배가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 영화가 히트한 후 영화음악이 사랑받았던 사례가 있었나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상영과 함께 요즘 어딜 가도 퀸 노래가 들립니다. 그 모습은 1997년 가을에 개봉된 영화 〈접속〉과 흡사해요. 영화 주제곡인 사라 본의 〈어 러브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죠. 비슷한 계절에 개봉된 〈보헤미안 랩소디〉 역시 영화가 히트하면서 2018년 대한민국의 겨울을 뜨겁게 채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신드롬보다 무서운 기세로 영화와 음악시장을 잠식하고 있어요.”
 
  ― 왜 한국인이 이렇게까지 퀸 영화와 음악에 열광할까요.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10월 이후 상당히 떨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촛불혁명에 앞장섰던 2030세대들은 이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봐요. 그러나 체감 현실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자 현실을 타파하고, 폭발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커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던 중 고루하다 여기던 윗세대들의 소셜미디어(SNS) 곳곳에 등장한 퀸과 프레디 머큐리에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030과 4050이 한자리에 모여 관람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주체하지 못할 감동까지 받게 됩니다. 마치 1969년 8월 미국 뉴욕 우드스톡(Woodstock)에서 개최된 히피족들의 페스티벌인 ‘우드스톡 콘서트’에 열광했던 4050세대의 기억처럼, 디지털화되고 개인화된 현실 속에서 또 다른 분출구를 찾고자 고민하던 2030의 내재된 바람과 결합됐다고 생각해요.
 
  ‘음악산업은 불경기에 더 성장한다’는 법칙을 증명하고 있다고 할까요?”
 
 
  “한국인은 브릿팝의 우울한 정서를 좋아해”
 
《월간팝송》 1984년 5월호에 실린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의 인터뷰 모습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LP바인 ‘뮤직박스’를 운영하고 있는 DJ 조중석씨는 지금도 DJ박스에 앉아 손님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신청곡도 틀어주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퀸에 열광하는 심리는 경기가 안 좋을 때 복고문화가 살아난다는 통설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어요.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대박 났던 사례 역시 우리 경제가 어려울 때였거든요. 요즘 청년실업난이잖아요. 성 소수자, 차별받는 이민자의 상징인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로 ‘뿅’ 간 것이죠.”
 
  ― 한국인이 퀸 음악을 좋아하는 기질적인 측면이 있을까요.
 
  “가게 손님들의 신청곡을 보면 미국팝보다 브릿팝이 훨씬 많아요. 브릿팝에는, 영국의 궂은 날씨처럼 레인코트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조금은 칙칙하고 특유의 우울한 정서가 배어 있는데 그런 측면이 미국 팝과 다른 면이죠. 한국인 정서가 아무래도 브릿팝과 어울리는 것 아닐까요.”
 
  ― K-POP 같은 국내 대중음악에 대한 반성적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IMF 이후 공중파들이 밴드를 출연시키지 않았어요. 출연료가 비싸기 때문이죠. 대신 데모 테이프를 틀면 되는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을 선호했어요. 비주얼 음악에 관심이 쏠리면서 밴드들이 설 자리를 잃었죠.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그런 밴드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싹텄다고 보입니다. 요즘 직장인 밴드가 다시 결성되고, 악기 판매도 다시 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요.”
 
  이번에는 정통 록음악 매거진 《파라노이드》의 송명하 편집장에게 물어보았다. 송 편집장은 1990년대 음악잡지인 《핫뮤직》에서 수석기자를 지냈다. 《핫뮤직》은 창간호(1990년 11월호)에 레드 제플린의 보컬 로버트 플랜트를 표지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었다.
 
  “사실 퀸의 코어(핵심) 팬이라면 영화 서사적인 면에 실망한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스토리 전개보다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영화가 만들어졌거든요. 그것은 퀸 음악이 지닌 매력 때문이죠. 한 번 들으면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멜로디라고 할까. 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광고음악으로 퀸 노래를 자주 접했던 측면도 있어요.”
 
  ― 왜 유독 한국에서 퀸 신드롬 현상이 나타날까요.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1991년 11월 24일)은 분명 충격이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엔 매스컴들이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어요. 사인(死因)이 에이즈와 관련됐다는 점, 전성기에 비해 퀸의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영화는 프레디 사후 우리가 놓쳤던, 혹은 놓치려고 했던 이야기들을 터놓고 보여주고 있잖아요. 또 영어권 국가와 달리 한국인은 1970~80년대부터 퀸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가사에는 비중을 두지 않았어요. 그런데 영화 자막을 통해 노랫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것입니다.
 
  왜냐면 1980년대 중반까지 퀸을 좋아했던 이들은 ‘금지곡’의 멍에 때문에 불법 복제음반(백판)의 조악한 음질로 음악을 접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영화관의 풍성한 사운드에다 금기시됐던 노랫말까지 당당하게 듣고 확인할 수 있게 됐잖아요. 과거 향수를 떠올리며 2번, 3번 계속해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런 보상심리 같은 것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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