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처음 본다는 나가노 사람들 | ||||||||||||||||||||||||
마쯔시로 터널의 조선인 비극의 현장을 가다 | ||||||||||||||||||||||||
나가노(長野)현 고쇼쿠(更埴)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은 1년 중 봄을 빼곤 외지인의 왕래가 뜸해 늘 조용하다고 한다. 봄만 되면 살구꽃이 온 마을을 뒤덮는 장관을 연출하는데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마을 전체가 주차장이 되다시피 해 주민들은 가급적 돌아다니지 않고 차량이용도 자제해 가며 외지인들을 맞는다고 한다. 그곳에 살고 있는 노리코 씨와의 만남이 내겐 즐겁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편물(編物)을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는 편물디자이너이다. 해마다 전시회도 여는데, 기계편물이 아닌 온전히 수작업을 고집하며 틀 앞에 앉아 실을 걸고 한 올 한 올 엮듯 짜내려 간다. 편물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손으로 실을 고르고 색을 맞춰 한 줄 한 줄 짜면서 자신이 원하는 천이나 소품이 만들어질 때 어린 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나는 난생 처음 틀 앞에 앉아보았다. 베틀 앞에 앉은 내 모습은, 누렇게 바랜 옛사진 속의 아낙네가 21세기에 환생한 것 같았다. 양파껍질을 모아 달인 물이나 정원에 핀 꽃과 풀로 천연염색을 하는 순수 아날로그파다. 그 집안엔 늘 양털 뭉치가 날아다니곤 했다. 난 지금도 양파껍질을 벗길 때마다 노리코 씨를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 고쇼쿠 사람들에겐 한국하면 최상이 떠오를 것이라고 했다. 노리코 씨 집에 며칠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놀러왔고 그들의 제안으로 마지막 전날은 ‘특별연주회’를 열어주어 내게 뜻깊은 추억을 선물했다. 우리의 거문고 비슷한 고토(琴)를 노리코 씨의 이웃 분(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이 들고 와 연주, 기라쿠보(氣樂房:노리코 씨의 거처 겸 편물을 지도하는 곳의 이름)는 작은 콘서트홀이 되었다.
다들 만져보고 앞태를 보자~ 뒷태를 보자~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낸다(일본인들은 칭찬에 후하다. 작은 것이라도 온갖 표정을 다 지으며 호들갑스럽다 싶을 만큼 추켜세워 준다). 기왕 입은 김에 한국의 예의범절이나 알려주자는 생각으로 앉을 때의 자세며 입었을 때의 마음가짐,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도 열심히 따라 해보더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진다.”고 한다. 기모노를 입었을 때의 숨 막히는 고통(!)과 좁을 수밖에 없는 보폭의 한계에 비해, 한복을 입으면 넉넉해지는 마음을 그들이 알 수 있을까마는.,, 그곳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부쩍 늘었다고 노리코 씨가 전해주었다. TV에서 한국 관련 얘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 해진다고 하니 고쇼쿠를 방문한 보람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 갱을 알려주었다. ‘마쯔시로 대본영(松代 大本營)’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2차 세계대전 중 패배를 감지한 일본 군부가 연합국 측에 ‘마지막 타격’을 주기 위해 군사시설을 만들려던 곳이었다. ‘대본영’이라는 명칭은 천황 직속 군대의 최고통수기관을 말하는데, 당시 이곳에 황거(皇居)와 정부 관청, 방송국 등 천황제 국가를 통치하는 중추기관을 모두 이곳으로 옮긴다는 계획이었다.
총연장 약 6km의 규모로 패전 당시엔 이미 80%가 완성된 상태였다고 한다.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는 500미터 터널엔 발파를 위해 박아둔 쇠 봉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돌무더기를 실어 나르는 달구지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했다. 내가 그 터널에 들어갔을 때 마침 어느 일본인 해설사의 설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 1만 명이 투입되었고 그 중 7천 명 정도가 조선인이었다. 나무껍질 등을 벗겨 연명하곤 했다니, 그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진 중에는 조선인의 피맺힌 한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터널 벽에 선명한 한글로 새긴 자신의 이름과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웁니다’ 등의 문구에서 그들의 고통이 짠하게 전해져 왔다.
‘역사의 증거’인 셈. 내가 그곳을 방문했던 당시, 나 몰라라 하는 일본 정부를 대신해 시민단체가 나서서 위안소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가칭 ‘또 하나의 역사관 마쯔시로’ 건설실행위원회>. ‘위안소’ 건물을 해체, 보존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비참하게 죽어간 조선인 희생자의 추도비를 세우기도 했다.
일본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금도 일본의 그 민간단체가 활동 중이라고 한다. 구로사키라는 여성과 통화하던 중,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래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도 모금은 계속되고 있고 한국 ‘나눔의 집’에서도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원당리 65 Tel: Tel: (031)768-0064 Fax: (031)768-0814 후원계좌 예금주:나눔의 집 1)할머님들의 생활, 복지, 증언활동을 위한 후원 농협 163-01-407551 국민은행 248-01-0041-484 2)할머님들을 위한 전문요양시설 건립에 필요한 '땅 한평 사기운동'후원 농혐 221157-51-032241 3)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중국거주 '위안부' 피 해자 돕기. 현재 중국에는 14명의 피해자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고 한다. |
농협 221157-51-027886
(위 사진은 다음에 쓰게 될 '기요사토 여행' 이미지 중 일부입니다)
JP뉴스 홈피 : http://jpnews.kr/sub_read.html?uid=768§ion=sc4§ion2=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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