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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어서도 매년 500억 원 이상 버는 ‘엘비스 프레슬리’

릴리c 2009. 10. 1. 13:15

죽었어도 돈을 버는 엘비스?? 인터넷을 검색하다 발견한 글이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매년 수백억 이상 돈을 벌고 있단다. 믿어야 하나?

평생 엘비스 프레슬리가 좋아 사재를 털어 지은 <엘비스 기념관>의 이 종 진 관장에 의하면 ‘그렇다’ 다.

 

전 세계에서 팔려나가는 엘비스의 CD, 기념품, 영화, 그레이슬랜드에 몰려오는 관광객들...

그들이 뿌리는 달러... 엘비스 프레슬리에 관련된 갖가지 상품의 매출이 해마다 엄청나다는 얘기다.

 

 

엘비스 기념품들, 매년 엄청난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8월 소개했던 <엘비스 기념관 탐방기>를 하나 더 소개해야겠다.

현존하는 가수도 못깨는 기록들 매년 1월8일 생일과 8월16일 추모일, 이렇게 해마다 이틀씩 부활하는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에게는, 사후에도 갖가지 새로운 기록들이 끊임없이 세워지고 있다.

 

1. 사후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가수

2. 전세계에 가장 많은 팬이 있는 아이돌 가수

3. 가수로서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인물

4. 가수들이 뽑은 가수 넘버 원

5. 엘비스를 흉내내며 생활하는 모방가수 전 세계에 1만 여명

 

이외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에 관련된 기록들은 너무나 많다.지금도 전 세계 방송에서 그의 노래는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전 세계의 나이트 클럽 무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날 수 있다.

외모도 같고 창법도 같으며 다리를 떠는 것까지 진짜 엘비스와 똑같은 모창가수가 1만여 명 이나 되며 그가 거느린 가족까지 합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로 인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수십만 명이 넘는다.


기념관 현관을 지키는 엘비스 프레슬리


해외 언론에서는 그를 생존해 있는 기업가 보다 더 많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그런데 그는 이 세상에 없는 ‘죽은자’라는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 말씀대로라면, 그는 사후에도 엄청난 ‘덕’(德)을 쌓고 있다.

엘비스敎라고 할 만큼 그를 추종하는 마니아가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남을 배려하며 선한 행동으로 주변사람들로부터 신망도 두터운 사람이 많다.

 

사업가, 학교 교사, 체육인, 방송인, 신문기자, 운수업, 광고업, 여행업... 등 직장에 출퇴근 하는 사람보다, 자영업 등 개인사업가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은데 비율은 7대3 정도 이다.

 

파주의 엘비스 기념관, 생일이나 추모일은 물론이고 평소 주말에도 자주 찾아와 엘비스의 음악과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또 또 보는 팬들 중에는 60대가 된 영원한 엘비스 팬이 몇 분 있다.

40여년 전부터 엘비스가 아니면 관심도 안 가졌던 그분들은 모두 재미난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에피소드 1.

“나는 결혼 후에도 엘비스를 좋아했어요. 물론 남편도 알고 있었죠.

가끔은 농담 삼아 엘비스에 대해 질투를 보이기도 했어요.

남편은 엘비스를 ‘나의 연적(戀敵)이다!’라고도 했죠.

집안일은 절대로 소홀히 안했어요. 그러니까 이날까지 엘비스에게 향한 내 마음을 남편도 이해해 주었지요.

 

엘비스 때문에 부부싸움 같은 걸 할 만큼 옹졸한 남편은 아니거든요. 엘비스가 죽던 날, 1977년 8월 16일, 슬퍼하는 나에게 남편은 위로는커녕, 이렇게 말하며 승리자 같은 미소를 짓더라구요.

“드디어 나의 연적(戀敵)이 사라졌군...음하하하” 이 얘기는 방송에까지 알려졌어요...”

 

엘비스 팬들은 기념관에 모여 자신들의 꿈을 찾고 있단다

 

에피소드 2.

“저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우리들의 소녀시절은 가요보다 팝송이 대세였어요.

프랭크 시나트라, 냇킹 콜, 코니 프린시스, 안 마가렛트, 이브 몽땅, 에디뜨 삐아프...여고생이 팝송을 들으면 요새 말로 짱이었어요.

 

영어를 좀 안다는 거죠. 대학생 때 팝송을 듣는 건 필수였지요. 그때는 남학생이 팝송을 모르면 우린 남자 취급도 안 했다구요ㅋㅋ...

그렇게 좋아하뎐 팝송은 엘비스 프레슬리 때문에 폭발할 정도였어요.


파주 광탄가는 길가에 보이는 간판,
기념관의 상징물이다.

엘비스를 알지 못했다면 미국유학, 아니 이민을 갔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남학생들이 별로로 보였거든요.

60년대에 해외 문화에 심취되지 않은 학생은 많지 않았지요.

저는 지금도 학교에서 강의할 때 팝송, 특히 엘비스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틀어주지요. 학생들의 반응은? 7,80%는 무반응입니다.

 

미국이나 유렵의 젊은이들은 엘비스에 관한 매력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아들이 미국 유학 중에 선물을 보내왔어요.

엘비스의 그림이 인쇄된 커다란 타페스트리, 벽에 거는 장식품입니다.

함께 편지를 보냈는데 이렇게 써있더라구요.

 

“어머님, 접니다. 아들은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어머님의 고생에 계속 감동하고 눈물도 흘립니다.

귀국하면 더 좋은 아들이 될게요. 그런데 어머님, 저는 오늘 어머님이 좋아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동네의 가게에서 기념품을 보다가 놀랐어요.

제가 좋아하고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현재 가장 좋아하는 톰 크루즈의 기념품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념품 종류가 더 많은 걸 보고 놀랐어요.

 

우리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엘비스는 역시 대단한 엔터테이너였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용돈을 아껴 하나 선물합니다. 다음 달 용돈 더 보내주세요...ㅎㅎㅎ”

아들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엘비스가,‘그저 옛날 흘러간 가수일 꺼야’라고 무관심했다가 미국에서 직접 확인하곤, 우리 어머니는 보통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는 겁니다.” 그때 아들이 준 선물은 기념관에 기증했단다

  

 


엘비스 처럼 입고 엘비스처럼
노래를 불러보는데... 이종진 관장

흥미로운 화제가 많지만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에피소드 3.

“저는 전직이 방송PD였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어머니 몰래 이모 따라 이대강당에서 클리프 리처드 공연을 보았어요.인파 속에서 어쩌다가 이모를 잃어버리고 울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결국 어머니한테 들켜

호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팝송을 알기 시작했고, 라디오 공개방송 구경 등,,,

일찍이 엔터테인먼트에 관심이 많았지요.

원래 성격은 매우 내성적이었지만 대신에 팝송가수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화려한 외형적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자연스레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게 되었고 사춘기 시절에 그야말로 광적인 팬이 됐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소식이 있던 1977년 8월 16일, 엘비스가 사망했다는 비보에 저는 만 8일 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방송국 PD가 되어서는 다른 제작자보다 엘비스의 노래를 더 많이 틀었고, 엘비스를 모르는 사람들은 보기도 싫을 정도로 집착이 강했지요.

 

특집방송도 많이 했고요. 지금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가장 좋아하고 다음이 클리프 리처드에요.”

(지난 8월 16일 엘비스 추모일 모임을 소개한 글을 보고 싶으신 분은 http://blog.daum.net/moge-family/1061 를 클릭해 보세효~~^^*)

  

모이면 시간을 잊는 엘비스 팬들, 어둠이 깔리는 기념관...

 

 

 

 




글 : 2기 통신원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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