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본

4) 한 벌에 2천만 원 넘는 양복, 신주쿠의 맞춤집

릴리c 2010. 1. 4. 15:54

도쿄 거리걷기 4) 한 벌에 2천만 원 넘는 양복, 신주쿠의 맞춤집

 

신주쿠 거리를 걷다보면 유난히 외국인을 많이 만난다.

중국인 여성 3명이 거리에서 모금함을 메고 행인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집중호우로 인한 중국과 큐슈의 호우피해와 전년도에 일어난

지진 피해자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점심 시간대라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그러나 직장인들에겐 금쪽같은 점심시간이어서인지

 모두들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날 뿐, 관심을 갖는 일본인들이 많지 않다.

 

지난 2008 5 12일 중국의 쓰촨성에서 진도 7.8(중국정부는 8.0이라고 발표)

대지진이 일어나 사망자가 4만 명을 넘었고 실종자와 부상자를 합하면 32만 명을

훨씬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재민이 5백만을 넘었으며 피해 면적이 우리나라

면적을 능가하는 대재앙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구호의 손길을 보냈던 게 생각난다.

잠시나마 지진피해자를 도와달라는 그들의 호소가 혹시 거짓은 아닌지 의심했던 게

미안해 모금함에 돈을 넣었다.

 

 

 

 

 

 

연말이면 이웃돕기 모금이 여기저기에서 실시된다. 그러나 지난 연말의 모금실적이

저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15백만 원하는

수입양복이 불티나게(!) 잘 팔린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소형자동차 한 대 값과 맞먹는 옷을

입는 사람은 주로 CEO나 변호사, 의사, 금융전문가 등 부유층과 전문직 종사자들이라고 하는데,

일반 양복이 3~40만 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사람이 비단 나뿐 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덕망 있는 성공한 기업가 중에 양복 한 벌로 평생을 지냈다는 얘기가 가끔씩 사회면을 통해 소개되기도

하는데, 한 편으로는 그렇게 값비싼 양복이 잘 팔린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돈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다.

 

 

 

 

신주쿠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양복점. 문득 ‘맞춤옷’에 대한 향수가 일어 안으로 들어갔으나

가격표에 적힌 숫자를 보고 헉, 내 눈을 의심했다맞춤복 한 벌에 우리 돈으로 약 1천만 원!

(84만 엔)이 넘는다.

그곳은 기노쿠니야 서점 1층에 있는 <銀座 英國屋>이라는 양복점이었다.

도대체 어떤 옷이기에 한 벌에 1천만 원이나 될까?

양복업계에 투신한지 25년 되었다는 요모다(四方田) 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 집에서는 보통 영국에서 수입한 원단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 벌에 울 소재 157천 엔부터

천차만별의 가격을 보이고 있다. 최고 비싼 것으로는 영국산 키드 모헤어(kid Mohair, 100%

산양 새끼에서 추출한 털로 만든 최고급 소재)로 만들 경우 1785천 엔(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3백만 원)에 이르는데,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며 실제로 신주쿠점에서 판매한 적은 없고

주로 긴자점 고객이 애용한다고 한다.

신주쿠 점에서 가장 비싼 것은 캐시미어 소재로 만든 옷이 84만 엔(1100만 원)짜리로, 기업의 간부나

오너가 주 고객층이고 가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가 오기도 하지만 누군지는 밝힐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신분노출을 꺼리는 고객을 배려해 직접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원단의 종류와 가격. 워낙 고가이다 보니 원단의 샘플도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 담겨 있다.

원단가격은 1,700,000엔, 옷으로 만들 경우 세금 포함해 1,785,000엔. 우리돈으로 따지면

2천 3백만 원 정도다.)

 

 

 

계절적으로 여름용은 4~5월에, 겨울용은 9~10월에 맞춰야 제 때 입을 수 있다.

완성까지 한 달~ 한 달 반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치수를 재고 가봉까지 2, 완성하는데 다시 2~3

혹은 그 이상 소요된다고 하니, 성질 급한 사람 옷 기다리다 졸도하는 일 생기지 않을까 쓸데없는 염려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의 양복업계를 보자.

우리나라에서 처음 양복을 입은 사람은 누구이며, 양복을 처음 만든 장인은 누구일까?

<국내에서 양복을 처음 입은 이는 김옥균 구한 개화파 일당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세월 따라 직업 따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양복을 처음 입은 것은 1881년으로

소개됐다. 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친일내각에 의해 단행된 단발령(斷髮令ㆍ1895 12)보다 4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책은 ‘양복재단사(Tailor, Schneider)’를 소개하면서 이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당시 양복을 처음 입은 이들은

개화파를 이끌었던 김옥균,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이들이 일본을 방문했다가

양복을 입고 돌아온 것이 최초라고 밝혔다.>(헤럴드 경제 09.3.17 기사참조)

 

 

 (마침 손님이 없어 요모다四方田 씨와 편안하게 인터뷰했다.)

 

 

(고가의 수입원단)

 

우리나라의 첫 양복점은 1903년에 문을 연 ‘한흥(韓興)양복점’이 1호로 기록되고 있고

1906년에 서울에만 10여 곳의 양복점이 개업했다.

 

지금은 기성복이 대세를 이루어 맞춤양복이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장인정신을 살려 맞춤을

고수하는 양복점들이 서울 광교와 이태원 그리고 유명호텔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대체로 질 높은 옷을 만드는 우리나라의 양복장인들은 국내보다 외국으로부터 더 많은 주문을 받는다고

하는데, 값도 저렴한데다 디자인이 뛰어나 미국 대사를 비롯한 외국대사와 외교관, 국내 정치인들 중 단골이

많으며 미군병사들과 일본 관광객도 한 몫 하는 고객이다.

 

기성복이 없던 70년대까지는 맞춤양복의 전성기였다.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은 양복을 맞추기 위해

줄서고 웃돈까지 얹어줄 정도였는데, 당시 재단사는 인기 높은 신랑감 후보였다고 한다. 80년대 들어 기성복이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양복점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따라 맞춤집은 점차

모습을 감추어 사실상 거리에서 ‘ㅇㅇ양복점’이라는 간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시 맞춤양복이 부활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유는, 개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두드러지는데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맞춤옷에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란다.

양복재단사의 인기가 부활되는 날이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양복업계 25년 베테랑 요모다 씨가 양복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지난 <도쿄의 오래된 친구 만나러 가는 > 말미에 8천만 양복’은 2천만 원’을

잘못 적은 것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자료 참고..‘한국양복 100년사’/김진식 지음

 

 

 

 

(다음엔 도쿄에서 가장 비싼 땅 긴자 욘초메四丁目의 덴뿌라집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