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백령도

백령도의 100년 넘은 중화동교회와 성당

릴리c 2011. 6. 16. 08:30

한국 최초로 기독교가 전해진 백령도 중화동교회

천주교 선교사의 해로(海路)입국 거점-백령도

구세기 초(1816년) 백령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모아 그 기록을 정리하고 전시한

서북해안 유일의 역사기념관이 바로 이곳 중화동교회에 있다.

이 지역의 기독교 역사는 한국 기독교의 초기단계 역사로 영국에 의해서 시도되었고, 전개된 선교의 중심지가

백령도였다. 당시의 백령도는 대청 및 소청도와 함께 한, 중 해상 방어의 군사기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보니 서해상을 통해 들어오는 문화, 경제교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파 역시 백령도에서부터 자연스레 이뤄졌던 것.

이 무렵 기독교를 한국에 최초로 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중화동교회는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교회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150년 된 팽나무인데, 백령도의 생태학적, 학술적 보존 가치가 높은 이 고장의 귀중한 산림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어, 이 나무를 훼손하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계단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교회 내부는 시골의 여늬 교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주민들에겐 남다른 안식의 장소일 게 분명할 터.

그래서일까, 백령도를 돌면서 느낀 것 중 하나도 유난히 교회가 많다는 사실이다.

 

 

학교종은......땡땡땡~!!

교회종은......뎅그렁~ 뎅그렁~뎅그렁~~!!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종이다.

중화동교회 뜰에 놓여져 있는데 아마도 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하던 게 아니었나 짐작된다.

요즘은 종소리를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소음'으로 간주되어 교회와 이웃간 분쟁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추억의 소리로 기억되는 내게 종소리는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게 한다.

들에서 종일 일하던 농부와 그 아내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에 모자를 벗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끝없는 평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백령도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독교 역사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경로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년 넘는 역사를 지닌 중화동교회의 옛날 모습은 아래 사진 속 모습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현재 건물(위 사진)은 1968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며, 교회로 오르는 계단 옆의 큰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궁화 나무다. 수령 약 90년, 나무 높이 5.5미터에 이르는데, 보존이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2004년 7월 14일 <큰나무 보호수>로 지정 등록되었다.

무궁화 꽃이 활짝 피면 장관을 이룰 것 같다.

 

 

중화동교회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

무척 평화로워 보이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다. 실제로 백령도에 머무는 2박 3일 동안 느낀 점은

'평온함'이었다!!

 

 

이곳 백령성당은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자연경관이 뛰어나 어디에 세계 내놓아도 손색없는 백령도지만, 가장 큰 불편한 점이 바로 이정표였다.

큰 표지판 몇 개를 빼곤 우리가 찾는 명승지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다녀야할 만큼 열악했다.

지도에 표시된 하늬해변을 찾기 위해 헤메다가 지뢰가 묻혀 있다는 곳도 만나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했으니...

백령도를 관할하는 곳인 옹진군청에서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해 못할 것은, 옹진군청이 인천에 있다는 사실! 그러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결국 하늬해변은 찾지 못했다~!!!

길을 헤메다 만난 백령천주교회, 마가렛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백령성당'으로 기억하게 됐다.

 

하늬해변을 찾다가 만난 지뢰밭조차도, 산책하고 싶어질 만큼 아름다운 오솔길이다.

철책 안쪽의 지뢰밭 너머엔 바다가 펼쳐진다.

 

 

 

 

 

화동교회 못지 않게 백령천주교회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당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에 몇몇 선교사들이 중국의 변문과 의주의 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러나 쇄국정책으로 인한 경계강화로 육로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를 거점으로

하는 밀입국로를 택했고, 선교사들은 중국어선으로 백령도 근해를 통해 입국하게 되고 프랑스 선교사

17명이 입국했다.

이들 중 6명과 김대건 신부는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집전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미사 중에 성인품에 올랐다.

 

 

백령도 여행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