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구석구석

여수#2 민흘림 기둥 진남관의 위용

릴리c 2008. 12. 15. 16:12

 진남관(鎭南館)

 

위치;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2 
여수 진남관 / 전남 여수시 군자동. 보물 제304호. 조선시대.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했던 건물. 여수8경 가운데 제4경에 속한다.

 

 여수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鎭南館...남쪽의 왜구를 물리쳐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라는 뜻으로

진압할 진(鎭)을 써서 진남관이라 했다한다.. 현판은 숙종때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글을 썼다.

 

 측면에서 본 진남관(위).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 돌받침(양쪽 끝에 보이는 세로로 세워진 돌).

(아래사진) 세로로 서 있는 기둥은 이 건물을 지을 때부터 버팀목으로 세워진 것.

 

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둥은 단정하게 위로 솟아오르는 민흘림 기둥이다.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석주대(石柱火臺)...이충무공 휘하 수군들이 야간 훈련할 때

불을 밝혔던 화대로, 네 개였던 것이 지금은 두 개만 남아 있다.

 

 

 

진남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망해루(望海樓)'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남관 근처까지가 원래는 바다였으나

지금은 좀 더 떨어져 있다.  돌산대교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진남관 비석군(碑石群)

 

 

진남관의 위용

선시대 성종 11년 우리나라는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해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좌우에 각각 수군절도영을 설치한다.

전라도좌수영(진남관)은 남북으로는 종고산 바로 아래부터 망해루까지 270m 동설고는 360m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둘레는 1km가 훨씬 넘었다. 성벽을 따라 9개의 옹성과 성문은 동서남북 4개였다. 지금의 진남관 입구가 남문이다. 

 안에는 동헌,향천,진해루 등 78동의 건물과 7개의 우물 1개의 연못을 팠다. 또, 동문 밖 계산(경찰서 뒷산)에 고소대를 세워

전망대로 썼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용이 거의 사라지고 오직 진남관만 그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진남관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다 이 충무공의 후임으로 부임해 왔던 통제사 이시언장군이

1559년 정청과 객사를 겸해 신축했다고 한다. 그 규모가 무려 75칸에 기둥이 68개나 된다.

그 뒤에도 몇 번 고쳐 지었다고 한다.

진남관 문의/안내 : 여수시 문화체육과 061-690-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