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구석구석

창덕궁을 거닐다

릴리c 2009. 4. 12. 01:59

창덕궁

 

태종 7년인 1405년에 지어져  구한말과 해방이후까지

대한제국 마지막 황족이 거주한 풍운의 장소 창덕궁.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전까지 비원(秘苑)으로 불리던 곳.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인정문 아래 앉아 인정전을 바라보는 여행객들..

인정전 모습에서 활짝 피어난 연꽃이 연상되는 건 무슨 까닭인지...

 

 

 

樂 善 薺...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낙선제

1847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건물로 지어졌는데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고

창경궁에 속해 있다가 지금은 창덕궁내에 위치해 있다.

고종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가 있고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황제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는 1966년까지,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여사각각 1970년과 1989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작고.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 선천적으로 허약체질이었던 이 비운의 옹주는

일제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대마도주와 정략결혼 후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이혼하여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인 어려움속에 살다가 1962년 귀국,

역시 이 건물에서 사시다가 1989년에 돌아가신 한많은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자료내용:나무님 블로그 참고)

 

 

 

 

 

 

 

 

▲ 낙선재를 나오니 그 앞에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가 반긴다.

낙선재의 굴곡많은 세월을 간직했을 홍매화, 

사진에 담는 외국인도 그 슬픈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자유관람일인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구석구석, 발길 닿는대로, 내맘대로,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종일,

관람이 가능했다는 거...

 

여늬 궁처럼 건물마다에 안내표식이 없었던 게 조금 아쉬웠지만

(들어가 보았으면서도 무슨 건물이었는 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둘러보는 것도 즐겁다.

위 사진은, 건물 뒤쪽에 숨겨진 듯 남아있는 우물과

커다란 아궁이(10시 30분 방향의 철문). 곳간이나 주방으로 쓰이지 않았을까...하는.

 

 

바닥에서 조금 올라간 곳의 통풍구, 그곳에 얼굴을 가까이 대어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한낮 기온이 25도를 넘고 뜨건 태양열로 인해 땀이 솟던 오후였지만,

 에어컨보다 더 상쾌한 바람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함께 갔던 지인에 의하면,

건물을 지을 때 땅바닥에서 어느 정도 올라간 위치에 건물바닥을 만들어

중간의 공간이 통풍구 역할을 한다는 것.

겨울엔 통풍구를 막아 열을 보호하는데

이게 바로 궁궐의 통풍방식이라고 한다.

 

시커먼 끄을음에서 조차 옛향기가 나는 듯 하다.

위의 통풍구를 막고 이곳에 장작을 넣어 불을 땐다.

한번에 많은 양의 나무를 태우는데 그 열로 며칠 씩 난방이 되었다고 한다.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 

부용(芙蓉) 은 연꽃을 뜻하지만 현재 연은 한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주합루(정조가 최초로 규장각이라는 왕실도서관겸 젊은 신하들과의

토론을 즐겼던 학문의 전당. 나중에 인정전 옆에 규장각 건물을 별도로 지었음) 

 

 

 

 

▲부용지 옆의 영화당.

이곳은 각종 알성시(임금 참석한 상태에서 치루는 과거시험)등 과거시험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과거시험은 아니지만 어릴 적, 사생대회에 참가해 그림 그리며 즐거워하던 추억이...

 

 

 

▲ 단청이 화려한 창덕궁 내 다른 건물과 달리

소박하다 못해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던 자그마한 건축물 두 동.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무슨 용도였을까,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겼다.

폐비에 처해졌거나 빈의 자리에서 쫓겨난

왕의 여인이 거처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가을이 오면 다시 가보리라.